조병화 문학관
청와헌(聽蛙軒)
‘창을 열면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청와헌은 조병화 시인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며, 정년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으로 가끔씩 집필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던 공간입니다. 청와헌 옆에는<꿈의 귀향>이라는 시가 새겨진 조병화 시인의 시비가 있습니다.
개구리 소리 울리는 내 고향 난실리
조병화 시인이 태어난 난리는 뒤로는 야트막한 장재봉이 있고 앞으로는 어비리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남향마을이고, 한양 조씨가 40가구쯤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해요. 조병화 시인은 1921년 5월 부친 조두원과 모친 진종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 60세, 어머니 40세에 얻은 금지옥엽 귀한 늦둥이였죠. 마을의 지주이자 한학자였던 아버지 덕에 어린 조병화는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는 산과 들 그리고 개울을 뛰어 다니며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는 9살 되던 이른 봄날에 고향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 후로 낮선 서울살이가 시작되었고
이곳은 조병화 시인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어요.
꿈 많은 시골악바리 소년
조병화 시인이 꿈 많던 소년시절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보다 많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어요. 보이는 건 직접 발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책을 통해 상상으로 만나며......
그렇다고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작은 시골마을에서 상경해 어려운 생활을 하던 어린 조병화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매일 밤이 늦도록 공부에 매달린 악바리 학생이었죠.
그리고는 당시 수재들만 갈 수 있다던 경성사범에 들어가게 되면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죠.
대학시절에는 럭비선수로 뽑혀서 대회에 나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운동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여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해요.
또한 좋아하는 미술부 활동도 선배를 따라다니며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곤 했죠.
이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어요.
일상의 언어로 솔직하고 쉽게 시를 쓰다.
조병화 시인은 교사 생활을 하는 한편 독서와 습작에 몰두하면서 시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내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표하면서 낭만과 인생을 노래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요.
그의 근면 성실한 삶은 낭만과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그의 시세계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고 거의 해마다 한 권꼴로 시집을 냄으로써 한국시단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설적인 기록도 남겼어요.
조병화 시인은 시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본질에 대해 쉬운 일상의 언어로 솔직하게 표현하여 현대시가 난해하고 잘 팔리지 않는다는 통념을 무너트린 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요.
편운재(片雲齋)
시인의 호인 편운을 따서 지은 편운재는 1962년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 진종여사가 별세하자 그 이듬해인 1963년 어머니의 묘소 옆에 지은 묘막으로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벽에 새겨 놓아 시인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건물 안에는 시인이 생전에 썼던 혜화동 서재가 원형 그대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영혼의 시인 편운 조병화
조병화(1921.5.2~2003. 3. 8)
호 : 편운
고향: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주요수상: 국민훈장 동백장, 모란장, 아시아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
주요작품 : 버리고 싶은 유산, 어머니, 꿈
* 다음은 박두진 문학관 게재
문화관광해설사 이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