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해 시, 그 감각과 몽상의 시학
-<문학청춘> 2023 봄 55호 기획 특집 한국 단시조 김소해
박진임
감각과 몽상
무릇 시인이란 자신이 속한 세상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자연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보살피면서 그 자연이 들려주는 은밀한 사연들을 쉽게 알아듣는 존재가 시인이다. 프랑스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는 사랑은 몽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꿈꾸는 자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그 사랑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그러면 그들이 글로 쓴 것이 타자들에게 전달되어 타자들도 함께 그 기록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두 편의 시가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영혼들이 아직도 있다. 두 사람의 몽상이 서로 얽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다. 서간체 소설은 이미지와 은유들을 멋지게 모사하는 방식으로 표현된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로 써야만 하는 것이다.
There are still souls for whom love is the contact of two poetries, the fusion of two reveries. The epistolary novel expresses love in a beautiful emulation of images and metaphors. To tell a love, one must write. (7-8)
사랑의 감정을 기록한 서간체 문장, 서간체 소설이란 그렇다면 한 편 시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겠다. 고백의 서사, 앙양된 감정의 표현, 들어줄 대상을 적시하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부르짖는 목소리….
김소해 시인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몽상의 시인이다. 바슐라르가 정의한 대로 몽상 속에서 자연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그런 시인이다.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볼 수 없는 것을 꿈꾸고 꿈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텍스트에 필사하는 시인이다. 김소해 시인은 몽상 속에서 모든 견고한 대상들을 용해하여 새롭게 재구성한다. 그 세상에서는 시각적 요소가 청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청각적인 대상들도 다시금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해체되고 뒤섞인다. 그리고 서로 다시 맞물리며 서로를 부축한 채 새로이 일어선다. 「봄비」를 보자.
가풀막 천수답에 물 들어오는 소리
물소리에 쓸려가는, 또 쓸려오는 새소리
누구든 녹슨 경첩에 이 소리들을 먹이지
- 「봄비」
시인의 몽상은 봄비 내리는 날, 그 봄비를 지켜보는 일에서 출발한다. 봄비가 내리면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땅이 녹으면서 지구 전체가 말랑말랑해진다. 들판도 나무도 물을 머금게 되어 모두 넉넉한 가슴이 될 것이다. 그런 봄날, 천수답에도 빗물이 들게 될 것이다. 가풀막 천수답처럼 좁고 위태로와 보이는 곳에도 어김없이 물은 들어올 것이다. 김소해 시인은 그 물 들어오는 일의 여러 속성 중에서도 소리의 요소에 먼저 주목한다. 가파른 논에 물이 들어차는 것을 보는 일, 그 시각적 요소도 모든 이에게 충만함과 여유를 느끼게 할 터이다. 그러나 물이 들어오는 소리는 더욱 즐겁고도 가볍게 우리 영혼에 스미어들 것이다. 신경쇠약의 현대 도시인들도 물소리 들리는 밤이면 쉽게 잠을 이룰 수 있다. 그렇듯 물소리는 영혼의 휴식과 몽상을 유도하곤 한다. 김소해 시인의 텍스트에서 물소리는 단지 하나의 소리에 멈추지 않는다. 물소리에 새소리가 겹쳐 지면서 두 겹의 음악이 펼쳐지게 된다. 텍스트의 초장에 도입된 청각적 요소가 음악성을 구현한다면 중장에 이르러 그 음악성은 화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새소리는 “쓸려가고 쓸려오는” 소리로 드러나 있다. 새소리는 필연적으로 숲의 이미지를 초대하게 될 터인데 위의 “쓸려가고 쓸려오는” 구절은 그 숲에 바람조차 가볍게 불고 있음을 드러낸다. 초장에 제시된 가풀막 천수답과 물의 이미지에 이어 중장에서는 숲과 바람, 그리고 새의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장과 중장, 두 장을 통하여 김소해 시인이 그리고 있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밝고 평온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봄이라는 시간성과 논, 숲, 새, 바람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연의 공간을 보게 된다.
그처럼 여유롭고 조화롭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시적 화자는 세상과 지고지순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종장을 향해 갈 때는 돌변하여 충격적이며 이질적인 요소를 도입한다. 그리하여 시상의 급격한 전환을 보여준다. 초장과 중장에 등장한 모티프와는 대조적인 “녹슨 경첩”이 종장에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첩은 초, 중장을 구성하던, 조화롭고 유순하던 소재들과는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루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경첩이 지닌 금속성의 이미지 등장은 그처럼 예상 밖이다. 그것도 예사로운 경첩이 아니라 녹슨 경첩이다. 경첩은 독립적인 두 대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 사물이다. 녹슨 경첩은 숱한 세월 동안 견고하지 못한 대상들을 서로 맞물려 공존하게 만드는 구실을 맡아왔을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녹이 슬게 되었을 것이다. 종장에 이르게 되면 이제 봄비는 논에 물을 채우고 새소리를 초대하고 마침내 더 나아가 세상의 거칠고 지친 존재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장에서 시인은 “소리들을 먹인다”고 이른다. 먹인다는 표현은 중의적이지만 “소리들을 먹인다” 구절은 기름을 먹이는 이미지를 먼저 연상하게 한다. 녹슨 금속의 녹을 벗겨 내고 거기 기름을 먹여두면 그 금속성 물체 또한 반짝반짝 빛을 내게 될 것이다. 녹을 벗고 가벼운 영혼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물소리, 새소리가 금속성 경첩에도 스미리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봄비가 내려 물이 노래하며 흘러가고 새도 노래하며 날아가는데 그처럼 유동적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녹슨 경첩조차 갓 기름칠한 듯 빛을 내며 새 삶을 노래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은 김소해 시인의 몽상 속에서 온전히 재구성된다. 그 몽상 속 세상에서는 결국은 모두가 굳건히 독립하기를 포기한다. 금속성의 견고한 사물들마저 물 기운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녹아내리거나 조금씩 살을 내어준다. 오래된 녹을 벗고 새 삶을 살게 된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속에서나 볼 듯한 그런 순수하고 맑은 세상을 김소해 시인은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2. 쇠와 풀무질에 대한 몽상
김소해 시인의 세계에서는 저항의 대상이 한결같이 소멸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금속성의 물질조차 단단하게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마치도 고구마나 감자 같은 구근류의 생명체들이 서로서로 엉긴 채 상대의 뿌리에 자신의 뿌리를 이어가듯 세상 만물들은 모두 서로 넘나들고 어울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봄비」에 등장한 경첩조차 물소리와 새소리가 스미어들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쇳덩이의 가슴도 말랑말랑한 물질성을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다만 뜨겁고 뜨거운 불길 앞에서만 말랑해질 뿐이다. 이제 김소해 시인의 몽상 속에 드러난 사랑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자. 전혀 새로운 대상을 취하여 전개되는 사랑의 이미지를 따라가 보자.
사랑을 훔치려다 불을 훔치고 말았다
무쇠 시우쇠, 조선낫 얻기까지
숯덩이 사르는 불꽃
명치 아래 풀무질
- 「대장장이 딸」
무쇠 시우쇠와 조선낫은 무쇠를 녹이는 불, 그것도 숯덩이 사르는 불꽃의 존재가 있어 탄생한다. 시인은 쇠의 이미지에서 불의 이미지를 먼저 읽어낸다. 그리고 그 불의 이미지는 다시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라는 우주적 변화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불의 몽상이 금속성 도구의 운명에 대한 몽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장장이 딸’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시인은 가장 뜨겁고 거친 삶의 현장인 대장간을 시적 공간으로 변모되게 만든다. 대장간은 곧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위한 공간이 되고 서정적이지 못한 대장간이라는 공간이 사랑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시인은 먼저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역사(役事)의 중심에 놓인 것이 사랑이며 열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이란 길고도 힘든 연단의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 불, 숯덩이, 불꽃의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랑이 매개하는 무쇠의 물리적 변화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마침내 풀무질이라는 어휘의 등장을 보게 된다. 제목의 ‘대장장이 딸’에 드러나는 대장장이와 짝을 이루며 풀무질의 의미가 동두렷이 떠오름을 볼 수 있다. 숯덩이 사르는 불꽃에서 열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듯이 풀무질은 오래고 혹독한 사랑의 시련을 암시하고 있다. 풀무질, 그것도 명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풀무질임에 주목해보자. 삶이야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을 선사할 터이다. 사랑에의 목마름을 지니고 결연히 숯덩이 사르는 불꽃 속을 통과하고 있는 삶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김소해 시인은 그처럼 모든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다. 사랑시의 소재로 채택될 기회가 없었던 대장간이란 공간과 그 공간 내부에서 이루어진 풀무질이 오히려 가장 용감하고 강렬한 사랑의 열정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쇠를 녹이는 일, 그처럼 비서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노동이 곧 한 존재가 자신의 타자에게 바치는 지극한 열정의 상징이 된 것이다. 쇠가 지닌 금속성 물질성에 대한 몽상을 확장하고 있는 「용접」을 살펴보자. 금속성의 물질에 대한 명상이 용접의 은유로 확장됨을 볼 수 있다.
어디서 놓쳤을까 손을 놓친 그대와 나
실마리 찾아가는 길 불꽃이어도 좋으리
뜨겁게 견뎌야 하리 녹아드는 두 간극
- 「용접」
쇠를 녹여 서로 이어 붙이는 일이 용접이다. 쇠의 육체조차 강렬한 불꽃이 닿으면 녹아내리고 분리된 대상과도 결합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처럼 견고한 물질조차 서로에게 다가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세심한 눈길로 관찰하고 있다. 나무에 가지를 접붙이기하듯 쇠를 녹여 연결하는 일을 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명상해보는 것이다.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 (Henry James)는 소설가는 가장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의 무엇 하나 놓치는 것이 없도록 관찰하고 감지하는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김소해 시인의 텍스트는 제임스 소설의 한 페이지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용접’이라는 말은 이 텍스트의 주제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말은 제목에만 제시된 채 텍스트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 어휘이다. 텍스트에는 쇠의 이미지조차 직접적으로 제시된 바가 없다. 불꽃, 견뎌야 하리, 녹아드는, 간극… 어휘를 통하여 쇠가 불에 녹아 용접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텍스트의 도입에서는 그대와 나가 등장한다. 놓친, 손을 놓친, 어디서 놓쳤을까…. 초장은 그처럼 그대와 나, 그리고 둘 사이의 분리만이 그려져 있다. ‘손을 놓치다’가 암시하는 바는 종장의 말미에서만 ‘간극’이라는 선명한 종결어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쇠와 쇠의 육체를 녹여서 연결하는 용접의 과정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분리된 두 주체의 관계 회복을 노래하게 된다. 마이클 리파테르 (Michael Riffaterre)가 언급한 바 있듯이 시는 무언가를 언급하면서 다른 것을 의미하는 예술 장르이다. 김소해 시인은 리파테르가 언급한 시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는 텍스트를 보여준다. 풀무질이 사랑을 향한 기원과 그 실현의 장이 되고 용접이 상실한 관계의 회복을 상징하는 행위가 된다. 어쩌면 가장 비서정적인 소재가 쇠일 것인데 김소해 시인은 그 쇠를 텍스트에 초대하여 몽상의 시학을 전개하고 있다. 쇠의 속성을 관찰하면서 쇠의 물질성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장면들을 몽상 속에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미지와 언어의 미래
김소해 시인이 구현하는 이미지는 매우 낯설고 신선하다. 경첩에 물소리, 새소리를 먹이는 이미지, 불로 쇠를 녹여 연장을 빚는 이미지, 또는 녹아내린 이후 새로이 결합하는 금속 용접의 이미지… 김소해 시인이 구현하는 그와 같은 이미지의 새로움은 시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지는 모국어의 운명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말이 그 결을 다듬으며 틀을 넓혀가고 있다고 믿으며 더욱 긍정적인 기대를 하게 된다. 바슐라르는 시는 언어의 운명에 속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Poetry is one of the destinies of speech 3) 시를 읽을 때 독자들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독자가 그 시에서 언어의 긍정적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에서 경이로움은 발화의 기쁨과 짝을 이룬다. 말하면서 얻는 기쁨은 언어의 새로운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다.
In poetry, wonder is coupled with the joy of speech. This joy must be considered in its absolute positiveness appearing as a new being in language. (3)
시의 차원에서 언어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이 내 느낌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거나 감각한 바를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를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과 접촉한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는, 그 이미지의 새로움으로 인하여 언어의 미래를 열어준다고 할 수 있다.
In trying to sharpen the awareness of language at the level of poems, we get the impression that we are touching the man whose speech is new in that it is not limited to expressing ideas or sensations, but tries to have a future. One would say that the poetic image, in its newness, opens a future to language.(3)
바슐라르가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이미지를 구현하는 시는 언제나 독자로 하여금 경이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 그 경이로움은 결국 언어의 새로운 속성을 발견하는 데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김소해 시인이 봄밤과 가을날의 청량함을 그려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자. 매우 이질적인 이미지 속에서 봄밤과 가을날이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봄밤의 정취를 그리면서 와인 잔의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는 「봄밤」을 보자.
진달래 붉은색에 질정 없이 마음 붉어
창틀에 앉아 쉬는 달에게 와인 한 잔
쨍그랑, 잔 부딪는 소리 달빛 부딪는 소리
- 「봄밤」
김소해 시인은 이 시에서도 달을 바라보면서 그 달의 시각적 이미지를 잔 부딪는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에 중첩시킨다. 그 이미지의 새로움은 충격적이어서 ‘봄밤의 한순간은 천냥에 값하나니’ 하고 노래한 중국의 한 시인의 노래가 참으로 아둔하게 느껴지게 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하고 노래했던 이조년의 텍스트도 참으로 담백하고 소박한 드로잉 작품처럼 느껴진다. 이화, 월백, 은한, 자규… 이조년이 바라보던 어느 봄밤의 그 동일한 시간대와 풍경을 새롭게 재현하는 김소해 시인의 텍스트를 보라. 달은 하릴없이 문인의 정원에 떠 있고 자규는 무심하게 봄밤을 울고 있는데 오직 춘심에 다정도 병인 이는 시적 화자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이조년의 봄밤 풍경이다. 그러나 김소해 시인은 대상들을 단순히 스케치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소해 시인의 달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누군가의 창틀에 앉아 쉬고 있다. 초장에 등장한 진달래가 붉다고 했고 그 진달래로 인하여 시적 화자의 마음도 붉다고 했으니 해와 달은 바쁘게 봄날의 지구를 견인해왔으리라. 여유롭고 풍성한 마음으로 시적 화자는 그런 달에게 와인을 건넨다. 달도 그 초대에 화답하여 잔을 내밀어 그곳에 쨍그랑, 잔 부딪는 소리 울린다. 잔 부딪는 소리가 다시금 달빛 부딪는 소리로 변화한다. 그렇다면 참으로 조화롭고 다정하고 흥겹기조차 한 그런 봄밤의 풍경이 완성되는 것이다. 봄밤의 풍악 소리가 제대로 적절히 울릴 법도 하다.
이 텍스트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적 모티프의 사소한 것 하나도 무심히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초장에 등장한 “진달래 붉은빛”과 “마음 붉어”는 중장에 등장할 와인 한 잔의 이미지와 정합성을 이루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진달래 피는 시절, 개나리, 목련도 함께 얼려 피게 마련일 터이고 뻐꾸기도 울음 울어 적당할 것이다. 폭죽 터지듯 한 개나리의 노란 기운이나 베르테르를 그리워하게 만들 순결한 목련 이미지는 이 텍스트에 조화롭게 얼려 들기 어렵다. 오직 진달래의 붉음이 와인의 붉은 빛을 위한 적절한 배경 색을 이루어줄 것이다. 그리고 진달래의 붉음과 와인 한 잔의 붉음이 있어 잔 부딪는 소리가 참으로 명징하게 들리게 될 터이다. “쨍그랑”하고. 강낭콩 꽃보다 푸른 남강물이 있어야 논개의 붉은 넋이 더욱 돋보이듯 진달래와 와인의 붉은 빛을 등에 업은 채로만 잔 부딪는 소리가 청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잔 부딪는 소리가 극히 청명하게 들려야만 비로소 텍스트의 종결이 적절한 효과를 본격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달빛 부딪는 소리”를 보라! 그처럼 극히 맑은 잔 부딪는 소리가 전제된 다음에야 비로소 독자는 달빛이 부딪는다는 이미지를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봄밤을 노래하면서 김소해 시인은 뻐꾸기 울음도 꽃향기도 모두 제거해 버렸다. 달과 함께 와인 잔을 서로 부딪치는 시적 주체의 이미지를 통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봄밤의 정체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가을, 세진교」의 이미지도 새롭기만 하다.
먼지가 쌓이는 방
죄 같은 먼지, 먼지 같은 죄
할 수 없이 죄 많은 나날
계곡물은 희고 맑아서
돌다리 하나만 건너도 단풍하늘빛 얼굴들
- 「세진교를 건너는 가을」
「세진교를 건너는 가을」에서도 시인은 아주 새롭고 선명한 방식으로 가을날을 그리고 있다. 다리 하나를 건너가면 아주 맑고 곱게 붉은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세진교라는 이름의 다리 이미지를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초장에선 속세의 부대끼는 삶이, 종장에선 돌다리 건너의 새로운 세상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중장은 그 두 이질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계곡물 위의 다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시조의 중장이 세진교처럼 그 두 세계의 이질성을 매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초장의 방과 종장의 하늘 이미지도 또한 대조적이다. 방은 개방된 공간이 아니라 폐쇄된 곳을 의미하고 그 방은 현실의 삶이 주는 속박을 상징한다. 죄와 먼지가 서로 교호하면서 등장하여 그 방의 특징을 확인하게 만든다. 죄가 쌓여 먼지가 된 것인지, 먼지가 죄를 낳은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혹은 둘 다 아닌 것인지… 분별할 이유도 없고 확인할 길도 없다.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처럼 그렇게 만연한 것이 현실 속의 죄의 요소들일 터이니 그러하다. 그러나 그 숨 막히는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위해, 현실로부터의 이탈과 초월적 공간으로의 이행을 위해 계곡물의 이미지가 등장하고 있다. 물은 분리의 이미지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시적 주체로 하여금 정화의 의례를 갖게 해주는 이미지로도 쓰인다. 그리고 종장에 이르러 마침내 돌다리가 등장한다. 먼지를 벗어난 곳, 단풍하늘빛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는 것이 참으로 자연스럽기만 하다. 몽상 속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를 고스란히 필사하는 시인이 김소해 시인이기 때문이다. 몽상 속의 유동적 이미지 중에서 가장 선명한 것만 추려내어 군더더기는 과감하게 제거하는 시인이 김소해 시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중압감을 온몸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은 몽상의 존재 때문이다. 몽상을 통해 그 현실 속에서도 비현실적인 시간과 초월적인 공간으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몽상은 꿈과는 달라서 꿈은 진술할 수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으나, 몽상은 진술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회성의 속성을 지닌다고 했다. 꿈은 정신분석학자를 위한 소재이고 몽상은 현상학의 영역이라고 도 했다. 그처럼 재기술하기 어렵고 분석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 몽상의 정체라고 본 것이다. 헬렌 벤들러 (Helen Vendler)는 시는 꿈과도 같은 것이며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시를 이루는 것 중에는 논리적 비약, 함축, 생략 등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시를 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접근법에 따르자면 벤들러가 언급한 것은 수정될 필요가 있겠다. 시가 꿈과 같다고 말할 때 벤들러가 의미한 것은 시는 몽상의 흔적이라는 것이었을 터이다. 몽상이 펜 끝에 멈출 때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표현대로 “몽상은 한없이 아래쪽을 향해 달려 내려가는데 시는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구실”을 할 뿐이다 (6).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한 편의 시 텍스트는 우리의 의식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한다.
김소해 시인은 그토록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 헤매며 이미지의 새로움을 십분 구현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군더더기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삭제한다. 매우 세련된 텍스트를 이루어낸다. 끝없이 몽상하면서 그 몽상 속에서 이미지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그 이미지의 힘으로 우리의 의식의 지평도 확장되고 모국어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고 있다. 김소해 시인의 텍스트에 구현된 이미지의 새로움을 즐거움으로 읽어보자. 물소리, 새소리가 녹슨 경첩을 먹이듯 우리 가슴에도 그 소리들을 먹여보자.
Bachelard. Gaston. The Poetics of Reverie. Boston, Beacon Press, 1969.
-평론가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