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해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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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명제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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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소해 |
조회: 1093 등록일: 2023-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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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해 시조집『흔들려서 따뜻한』서평
말씀의 꽃, 그 언저리 조명제 이젠 때로 자유시도 지겹다 싶은 21세기 디지털 문명시대에, 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정형률의 신작 시조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문학사의 열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전통시조는 일제 강점기 때 크게 위축되어 그 명맥을 잇기조차 힘든 수난의 역사를 헤쳐 오고, 요동치는 자유시의 풍랑 속에서 용케 살아나 오늘의 찬란한 부흥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실천되기 시작한 자유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는 의당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시조시형은 굳건히 맥을 이어, 시조시인의 독자적 문단이 형성됨으로써 현대시조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시조단이 형성되고 여러 시조잡지가 발전적 경쟁의 체제 속에 있다는 사실은 시조가 단순히 장르 연명적 차원이 아닌, 특별한 그 무엇이 새롭게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유수한 작가들에 힘입은 시조의 새로운 가치 창조적 미학이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 속에 말이 있어 펼치면 흠이 될까 숨겨도 진한 향기 소리보다 멀리 간다 익어서 가 닿으리라 몸으로 쓴 네 문장 -「무화과」전문 지금은 우리나라 영암 등지에서도 무화과를 재배하고 있지만, 일찍이 우리는 ‘무화과’를 성경 속에서나 읽고 들었었다. 이름 그대로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전설처럼, ‘도대체 꽃이 없이 열매를 맺다니?’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살아올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 그 환상 같은 궁금증이 풀렸다.「물수제비」의 ‘문자가 없는 속엣말’과 아울러,「무화과」의 초장 ‘꽃 속에 말이 있어/펼치면 흠이 될까’가 일거에 그 비밀을 풀어 준다. 그것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라는 성경의 언술과 다를 바 없는, 언어의 정곡을 찔러 보인 시적 감각에서 비롯된다. ‘로고스’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로 풀이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나 이 ‘말씀 중심주의’에서 살짝 비켜나, 과실의 내부에서 몰래 핀 꽃의 ‘숨겨도 진한 향기/소리보다 멀리 간다’는 깊은 울림의 종장을 빚어낸다. 왕대밭 저렇게 꽃 피워도 되나 몰라 꽃 피면 죽음인 줄 아는지 모르겠네 꿋꿋한 직립의 지조마저 팔을 벌려 받는 업 함부로 내려앉는 어깨 위 눈송이들 하늘에 솟은 왕죽 그도 마음 설레는지 우지직 허리를 꺾어 드러내는 저 속내 마디는 고를 풀어 피리 소리 구멍이다 누구도 대신 못할 눈부신 짐을 두고 뜨겁게 꽃 피워 올린 댓잎 푸른 사랑이다 -「폭설」전문 꽃의 내밀함을 노래한「무화과」의 시상은 3수로 구성된 연시조「폭설」로 전이된다. 폭설을 받아 내고 있는 왕대숲은 풍성한 설화(雪花)를 피운 형상이다. 왕대는 60년 만에야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일생에 딱 한 번 풍성하게 꽃 피우고는 죽어 버린다는 왕대, 그 비장한 생태는 무화과의 내부로 타오르는 침묵의 꽃과 상통한다. 시인은 그런 왕대의 생태를 한 겹 더 굴절시켜, 한겨울의 폭설을 받아 눈꽃을 피운 듯한 풍경을 형상해 보이고 있다. ‘직립의 지조’로 받아 낸 폭설의 무게로 ‘우지직 허리를 꺾어/드러내는 저 속내’ 또한 다른 방식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竹)는 죽어(베어져) 화살이나 죽창 같은 무기가 되기도 하고, 젓대[笛] 같은 악기가 되기도 한다. 악기와 무기 사이, 거기에는 인간이 개입돼 있지만, 인간의 욕망 이전에 이미 대는 그 상극의 요소[자질]를 스스로 지녀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궁극에는 그러나 악기[노래/시]가 무기를 이기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마디는 고를 풀어 피리 소리 구멍’인 왕대의 진실은 생애의 꽃[自花]보다도, 지조로 피워 낸 설화보다도 뜨거운 ‘존재의 꽃’을 피워 올린 ‘(댓잎) 푸른 사랑’ 그것이다. 일렁이는 숲 한 자락 그린다 하더라도 초록 물든 여백에는 건네야 할 말이 쌓여 화폭에 받아 어르네 반짝이는 햇볕까지 가는 대로 붓을 따라 모퉁이 돌아들면 수사는 죄다 벗고 통점 없는 길이 오네 옆모습 언저리에는 귀에 익은 발소리 -「귀에 익은 발소리」3수 중 23수 대개 사유의 깊이와 조사(措辭)의 적절성, 그리고 창조적 율격에서 시의 힘은 발현된다. 흔히 실망의 대상이 되어 왔듯이, 율격에 대한 원리와 기초적 이해 없이 전통의 시조율격을 무시한 파격이 현대적인 것인 양 오해해서는 안 된다. 현대시조는 시조시형의 율격적 전통이라는 절도 있는 규범적 미학의 바탕 위에서 재창조될 필요가 있다. 김소해의 시조가 감명 깊은 것이 되는 까닭은 이 같은 규범을 잘 지켜 다스리면서도 그 규범마저 시로 승화해 내는 능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귀에 익은 발소리」의 “색이라 할지라도 어찌 다 그립니까/당신이 깊어지면 색은 외려 줄어들고//응답을 기다리다가/모서리만 건드리네”라는 첫 수는 깊은 깨달음의 사유를 통한 시조 작시론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침묵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를 천착해 온 시인은 시조 언어의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연장선상에 놓고 볼 만한 작품「고속열차」는 인생 여로의 이면에 시[시조]의 길이 곧 삶의 길이요, 깨달음의 길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오늘도 외길 위에 가야 하는 나를 본다 빠를수록 빛나는 걸음 헛디디면 안 되지 종착역 다음 역명은 묵언으로 남기면서 산다는 건 아슬하게 평행으로 가는 레일 남도창 한두 소절 그늘이 깊어질 때 그 자리 열차 기다린다 해인으로 가는 차표 -「고속열차」전문 달구지와는 달리 초고속시대의 고속열차는 걸음 헛디딜 경우 으레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비록 오락적 성격이 강한 영화이긴 했으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속도 지향의 버스에 탑승한 인류의 운명을 날카롭게 암시한 영화 「스피드」를 통해 우리는 오히려 ‘느림의 미학’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외길 위의 급한 현대인의 아슬한 행로를 직시하며 ‘종착역 다음 역명은/묵언으로 남기면서’라는 함축적인 시행을 뽑아낸다. 아울러 ‘남도창 한두 소절 그늘이 깊어질 때’의 ‘그늘’(*판소리의 용어이기도 함)의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그리고 ‘해인으로 가는 차표’라는 시적 담론의 절정을 빚어 낸다. 이런 깨침[사유]은「원효대사 1」의 ‘송장물도 화엄이다’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가다가 중도에서 깨달은 바 있어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승려였다. 그 때의 해골물 사건은 그를 마침내 해동종의 시조가 되게 했다. 밭 갈고 물 긷는 필부필부 경전임에랴 득도의 시정에는 남루도 짐이라면 회향(回向)이 멀리 있겠느냐 두드리는 조롱박 -「원효대사 1」3수 중 끝수 깨침은 높은 하늘, 혹은 절간의 견고한 벽면이 아니라 ‘밭 갈고 물 긷는 필부필부 (삶의)경전’에서 온다. 그런데도 ‘당신이 꿈꾸어 주신 화엄 천지 어디입니까’로 시작되는「원효대사 2」에서 시인은 원효의 화엄사상이 명성으로만 전할 뿐 탐욕스러운 오늘의 세상에 미치지 못하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탄식을 드러낸다. 뉴타운 대도시가 공룡보다 의젓하게 흔들고 말면 그뿐 너나없이 공범입니다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경계 내비도 못 찾는 길 천 년이 몇 번인들 배고픈 나는 늘 배고프고 신화 같은 경제 성장 몇만 불 소득에도 당신이 품어야 할 노숙 그 때처럼 춥습니다 -「원효대사 2」3수 중 23수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 준다는 슬기의 바다 해인과, 만행 만덕을 닦아서 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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