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시 무슨 연이 닿았음이 분명하지
수목원 산책길에 아왜나무 이름표 찡긋
내 속에 해답없는 질문 그득한 줄 어찌 알고
아-왜 아-왜 산다는게 기껏 질문뿐인 것을
수천수만 푸른 귀가 열리면서 꺼덕이면서
질문도 아닌 질문들 얽히다가 풀릴 때 -김소해, /질문나무/ 전문, /좋은시조/, 2017, 여름호
우리는 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그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꾸 그 대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대상이 되면 질문거리는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 하게 된다. 그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령, 내가 직접 새가 되면 새가 알을 품고, 날고, 먹이를 낚아채는 그 모든 모습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다시말해 질문이 있다는 것은 화자가 풀과 나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내속에 해답 없는 질문" 이 그득함을 고백한다. 해답이 없는 질문이니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이요, 답을 찾을수 없는 혹은 이미 답이 없는 질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음을 안다. 산다는 게 기껏 질문뿐인 스스로를 향해 왜 여태 진정한 타인이 되지 못했는지 자문한다. "질문도 아닌 질문들, 얽히다가 풀릴 때" 나무와 내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면 질문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의문은 막힘, 단절, 온전히 그 대상이 되지못한 상태를 낳는다. 그래서 경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음율이 진것, 갱도가 막힌 상황에서 우리는 의문을 품고 질문을 한다. 막힌 것이 뚫리고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해방이 되고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송희 평론집 <경계의 시학>404 p <고요아침>2017.12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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