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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해 시인

<문학청춘>2024 봄호 호병탁 교수 평론

작성자: 김소해

조회: 1071 등록일: 2024-04-22

악보에 담지 못하는 그늘이 물든 소리 - 김소해의 『서 너 백년 기다릴게』   <o:p></o:p>   <o:p></o:p>오랜 기간이나 세월을 의미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몇 백 년’도 있고 ‘수 백 년’도 있다. ‘한 오백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서너 백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평소 들어 본적 없는 이 어휘를 대하는 순간 놀라며 눈을 크게 뜬다. 얼마나 새롭고 신선하고 명징한 말인가. 시집 제목이 『서 너 백년 기다릴게』다. 이 말이 견인된 작품을 본다.   <o:p></o:p>보름의 달밤인데 찔레의 봄밤인데// 늦도록 늦은 밤 나는 아직 길에 있네// 몰라라, 얼마나 멀리// 언제 그렇게, 그렇게// 시냇가라 했던가 바닷가 어디쯤// 정자 하나 짓겠다고 필생을 다 놓치네// 바람도 잠들지 못 한 길// 서 너 백년 기다릴게- 「찔레 꽃 명당」 전문   <o:p></o:p>찔레꽃이 핀 봄밤이다. 보름달까지 뜬 봄밤이다. 그런데 화자는 “늦도록 늦은” 이 봄밤에 혼자 길에 서 있다. 화자는 과거의 긴 여정을 돌아보며 그동안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찾아 “얼마나 멀리” 헤매고 다녔는지 자문해 본다. 그리고 스스로 답하는 것은 “몰라라”이다. 아니다. 그 진정한 속내의 답은 둘째 수에 등장하는 ‘정자’라는 은유다. 그가 “필생을” 바쳐 추구했던 것은 시냇가나 바닷가 어디쯤 “정자 하나” 짓는 것이었다. ‘정자(亭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그러나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어 잘 수는 없는 곳이다. 결코 고대광실 같은 대단한 집은 아니다. 많은 함유가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은 시인의 시가 창출되는 영혼의 거처가 될 수도 있고 한유할 수 있는 평안한 안식처도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필생을 다” 했지만 아직도 정자는 짓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서있는 길은 여전히 “바람도 잠들지 못한 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낙심하여 그의 꿈을 내려놓지 아니한다. 마지막 연에서 “서 너 백년”이라도 기다리겠다고 그 꿈을 다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긴 여운이 깊은 시적 울림으로 잔잔하게 다가온다.   <o:p></o:p>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가 여기 있네/ 어매의 어매로부터 그늘이 물든 소리/ 내딛는 걸음걸음이/ 그냥 그대로 화음이던// 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여서/ 아리랑 굽이굽이 일렁이는 마음이던/ 완창도 절창도 아닌/ 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 감자밭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이사/ 밭고랑 호미질에 노래가 얹힌 때문/ 가시고 한참 후에도/ 알은 여직 굵어있네- 「하지감자」 전문   <o:p></o:p>“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는 존재할 수 없다. 동서양, 현재과거의 어떤 노래도 악보에 담기게 마련이고 그래야 노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역설과 같은 악보 없는 노래를 정확히 찾아낸다. 그것은 “감자밭”의 “어매의 어매로부터” 불려오던 “그늘이 물든 소리”다. 「하지감자」는 말 그대로 춘궁기를 지나 하지 절기가 될 무렵 생산되는 밭작물이다. 어매는 그 배고픈 보릿고개를 견디며 심고, 매고, 캐는 밭일을 해야 했다. 바로 그 고된 노동의 과정에서 시인은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 노래는 “내딛는 걸음걸음이 그냥 그대로 화음”이 되던 “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였다. 그 노래는 “완창도 절창도 아닌/ 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 노래였다. 정말 가슴 뭉클해지는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감자밭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을 정확히 집어낸다. 그것은 어매의 “밭고랑 호미질에” 바로 이 “노래가 얹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가시고 한참 후에도/ 알은 여직 굵어”있다고 시인은 간절히 어머니를 회억하고 있다. 작품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사셨던 그리운 어머니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한 편의 헌사다.시인의 많은 여타의 시편들이 자신의 고향과 그곳의 고운 자연풍광, 그리고 그곳의 정다운 사람들의 살림살이 모습이 서정적 여운을 담고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실은 시인이 자신의 고향 남해를 그리고 있는 “마늘밭 시금치밭 겨울마저 진초록/ 이마가 맑은 사람들 꽃섬 가꾸며 살고 있다”(「남해」)라는 문장 같은 곳에서도 잘 갈무리되어 여실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특출한 언어구사력이다. 우리는 앞에 인용된 두 작품에서 이미 아름다운 모국어의 정서를 만끽한다. 그 중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오랜 세월을 말하는 ‘서 너 백년’이나 신산한 삶을 비유하는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 ‘그늘이 물든 소리’와 같은 시어들은 이 작품집에서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1983년 『현대시학』 등단 이후 40여년이란 긴 여정을 오직 언어의 정제와 정형의 미학을 소명처럼 받들며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더욱 풍성한 언어구사로 우리에게 감동의 울림을 계속 선사해주기를 기대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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