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심(孝 心)
김 성 열
(어머니는 아버지를 많이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밥상 앞에서 음식에 먼저 손을 대면
야단을 맞았고, 무엇이든 아버지께 먼저 갖다 드려야 했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한 몸짓을 보여주는 척했다. 아버지께
하는 양으로 너희가 어머니께도 잘 해야 한다는 의미 있는 교육적 방식으로 느껴지곤 했다)
나는 어머니를 저항했다/사랑하는 / 아들아 딸아 / 너희가 부모에게 억지로 대하지 말라 /
시켜서 훈련된 효(孝)는 핏물로써 가치가 없다 / 바늘 한 개라도 마음에서 솟는 / 더 값진
의미를 창조하라 / 저항은 반사적 교훈이 되어 깃발에 새겨 졌다. / 아버지는 직선의
침묵이었고 / 어머니는 깃발의 오리였다(졸작 “농기”제 5장 부분)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나의 어머니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이해를 갖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심의 깊이를 갖고자 하는 심정에서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경전들에서 읽어 온 효에 관한 내용은 나에게 있어서 부모를 이해해야 다달을 수 있다는 화두를 주었다.
이해한다는 내용은 무엇일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상대의 내면 깊이 들어간다는 말로 나는 정리한다. 아들이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실천이 효의 시작이며 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안에서 지내온 성장체험은 나의 잠재의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어느새 어른이 되고 난 이후였다. 돌이켜보면 애증이
중첩되어 있거나 긍불긍(肯不肯), 호불호(好不好)간에 어머니에 대한 복합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대상은 은혜로움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리고 싶은 유산도 없지는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효란 무조건적으로 부모에 대한
존경과 경애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못한 일에 대한 이해와 관용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형과 비교하면서 꾸중하고 훈계하였다. 어머니는 회초리 대신 말로 때렸다.
네 형 절반이라도 따라가라 이놈아-. 유년의 허허벌판에 미아리 치던 절반만, 절반만-.
한 소년의 심장을 반으로 쪼개고, 쪼개고 유년의 칼바람 소리를 지금 다시 듣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식이었다. <형의 절반> 이것이 나의 동심을 얼마나 쓰라리게 했을까.
당시에는 철도 없고, 말 속의 논리적, 이성적 판단도 유보된 채 가벼운 저항으로 대처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되돌아보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가를 알았다. 형의 절반도 못되는
아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형과 나는 체구도 지능도 유사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음을 어머니는 모르고 야단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은 4년 먼저 세상에 태어나서 항상 나의 머리 위에서 지냈다. 세월의 간격에서 오는 당연한 차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서 나를 탓했다.
어머니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교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만한 사리를 모를리 없었다. 형의 절반으로 치부되는 아우의 잠재의식 속에 무엇을 쌓아 왔을까. 저항과 반항과 차별대우의
어두운 그림자만을 길게 느려왔음을 깨닫고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했다.
어머니가 진정으로 형의 절반도 못되는 둘째라 여겼을까.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판단도 결단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왔고, 그러러니 하는 당연함에 매몰되어 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는 운명이라는 불가피성을 내재하고 있다. 도달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운명이라는 명제 안에서 용해시켜 판단과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둘째를 정말로 미워서 절반을 떼어 냈을까. 형을 쫓아 고분고분 순종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말았다. 이러한 논리와 사유를 통하여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솔한 효심으로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나라의 어머니께 보다 진심어린 효심을 전달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어머니를 이해하면서 산다.
진솔한 자기반성과 통찰 없이 맹목적인 효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규범과 습관과 전통에
얽매인 강요된 것이어서 진솔한 의미가 없다. 나의 마음속에서 육화(肉化) 된 이해심을 바탕으로 나의 효심을 갖고자 한다.
나의 슬하에 1남 2녀의 자녀가 있다. 관습과 제도와 경전에서 강조되는 효를 강조하지 않고 쉬운 말로 부모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라고 한다.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육화된 효심이 아니면 진한 피 냄새의 효에 이를 수 없다.
나의 태몽은 / 들판에서 펄럭이는 농기였다. / 어머니가 전해 준 미확인 운명증서다 / 나는
/ 농기를 유년의 동산에 꽂아놓고 슬피 운다. / 무덤에 계시는 어머니여 / 그때는 잘못 없었나이다. / 하늘 뜻 어머니 된 운명 밖에 / 더 있다면 아들의 허물이 있을 뿐인 걸요 / 하늘을 치솟는 통곡 소리에 내 귀가 먹어서도 아니고 / 나이 들어 철난 까닭도 아닙니다. / 비탄의 신음 소릴 소화하지 못한다면 더 어리석은 아들이 된다./ 받아드리지 못한 소년은 아들 된 운명을 사랑할 수 없다. / 깃발은 더 큰 능력을 주었고 / 더 멀리 더 높이 펄럭이며 /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라고 계시한다. / 삶의 에너지로 펑펑 샘솟는 관용과 이해의 침전물을 마시며 / 운명을 사랑하듯 어머니를 이해하고 그리워 한다 / 이제는 저쪽 세상의 어머니 / 지금도 절반의 아들을 걱정하십니까. / 형의 절반의 아우라 해도 / 어머니가 꽂아 준
농기의 깃발은 / 더 높은 곳에서 씩씩하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 반쪽, 반쪽의 상흔은 내
운명의 여로에 / 한 개 가물거린 점으로 남았을 뿐이지만 / 점 위에 쏟아지는 눈물 섞인
땀방울은 / 내 운명의 긴 강물에 떨어져 / 도도하게 흘러서 간다. / 온 쪽의 형을 따라
잡겠다는 하찮은 동심은 / 다른 사람을 향한 경쟁심리로 커져 갈 때 / 그 마음의 실체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 깃발 아래서 많이 울었다.(졸작 “농기”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