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보이는 풍경 / 김성열
* 숲속길 마을
이제 촌사람 다 되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검은 피부에 남보다 잘 생기지도 못한 얼굴이
까맣게 타서 꾀죄죄한 촌놈으로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그럭 저럭
서울 시민으로 40년을 살아왔는데 이를 어쩌나 싶어서 조금은 심란하였다. 교하에 이사
와서 산지 3년차, 모든 것이 처음에 그렸던 상상과는 딴판이어서 촌사람으로 잘 적응하고
산다. 주변의 정취가 차분하게 정겨워 지고, 신도시 다웁게 잘 기획된 자동차 길이며
잔 손길 정성들인 조경 사업도 의도적으로 산뜻하다. 황해도나 평안도 어디쯤에서
불어옴직한 바람은 맑고 시원하고 신선하다.
왕복 한 시간 코스의 중앙공원은 숲속길마을 앞을 병풍처럼 펼치고 있어 마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터널 같은 숲속 길을 걷는 기분이 곰살갑게 은근하다. 참나무(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잣나무, 소나무, 산벗나무, 나도밤나무가 제멋대로서 있는 자태들도, 제 가지의 잎들을 거느리는 꼴태도
보면 볼수록 더욱 신선하고, 정겹고,그래서 지겨워지지도 않는다. 조석으로 한들거린 나뭇잎도, 무심한 잡초의 꾸밈없는 몸짓도
한결 같질 않고 볼 때마다 별스럽기 그지없다. 오관의 감각 기관을 모두 자극하는 듯
입체적으로 맛깔스럽다. 아침의 나무는 기지개를 쭈욱 켜는 모습처럼 옆으로 시원스럽게
내어 뻗는 모습이고, 저녁의 잎새들은 잠자리에 들어서는 피곤한 사람마냥 찡그린 표정으로
축 처져 있곤 하는 것이다.
* 절이 보이는 풍경
내가 사는 아파트 11층에서 드멀리 내려다보이는 문발 들녘, 봄에는 예외 없이 꽃이 피고, 모내기 끝난 여름이 되면 잔잔한
무논에 연초록 비단을 깔아놓은 듯 부드러운 너울이 바람 따라 일렁이고, 황금빛 가을이 지나면 발목까지 쌓이는 흰 눈 위로
기러기 떼가 찾아든다.
들녘 끝에서 느닷없이 불현듯 산이 솟아 그 중턱에 절이 보인다. 낮은 주택가를 지나서
확 트인 들녘에 황량한 겨울바람이 지금 불어오고 있다. 직선거리로 시오리 쯤 될 시선
안에 들어오는 풍경에 나는 시 때 없이 반하고 만다. 계절 따라 숨김없이 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몸짓,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주택지에는 제 각각 다른 모양으로
움츠리고 있는 가옥들, 질 좋은 건축 자재로 잘 지어진 집들은 색깔도 좋고, 각각의
설계도 다양하게 디자인 된 전원주택들, 갖은 뽐 다 내고 갖은 멋 다부린 그 주택들은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나의 마음이 깊게 스며들지 못한다. 주택지 너머로 이어진 들녘,
개발이 유예된 들판 끝으로 약천사가 보인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 비칠 때 절간의
은은한 고요함은 깊고 넓다. 지장보전(地藏寶殿) 뒤편으로 약사여래대불의 신묘한 자태가
눈부시다.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약사여래대불은 좌대를 포함하여 13미터가 넘어서 우리
아파트 4층 높이는 넘을 듯싶다.
확 트인 십리 벌에 시공을 넘어서려는 듯 언제나 자비스런 모습, 넉넉한 자세로 나를
이끌고 간다. 망원경으로 대불의 자태와 영혼을 더 가깝게 보는 일이 잦아졌다. 가까이서
볼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아득하게 바라보면 왜 더욱 심오해 지는 것인지. 아무런 사심
없이 내 심중에 꽉 들어차는 신비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가르치러
들지도 않고,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려고 하지도 않고, 자유로우면서 구속적인 물심 양면의
경계선에서 언제나 의연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그 기운이 놀랍다.
신도시로 조성된 아파트촌에서는 4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이 범종의 타종
소리를 무자비 하게 깔아뭉개고 만다. 하지만 내 귀로는 가슴으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문발 들녘을 가로질러 너울 쓰고 밀려오는 바람 소리에 실린
그 종소리는 내 귓속에 넘치도록 채워진다. 밤이면 세 점 불빛이 숲속의 어둠을 헤아려
감감하고, 잠 깨어 뒤척거린 밤에는 범찰(梵刹)의 불빛에서 은은한 범종 소리와 목어의
청음이 쟁쟁하다. 때로는 심학산을 흔들어 깨우고, 교하의 합수 터 강물을 출렁거려 강화도
앞바다를 썰물지게 한다.
비오는 칠흑의 밤이면 약천사를 품고 있는 심학산은 은은히 용트림 짓고 하늘로 날아올라
삼도내까지 다다라서 하염없이 너울거린 그 자태에 내 영혼이 빠져들어 깊이 잠기고 만다.
조선조 숙종 때 왕궁에서 기르던 학 두 마리가 날아와 숨어든 골짜기, 수소문 끝에 학을
찾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심학산(尋鶴山). 괴력의 암석이 뒤엉켜 재미나게 붙여진
이름들, 신선바위, 마당바위, 범바위, 맥호바위, 장사바위, 맷돌바위, 만세바위, 굴바위, 두꺼비바위, 퉁수바위...
넓은 구릉지에 우뚝 솟은 교하지역의 끝자락. 산남리, 동패리,서패리에 이어진 해발 193미터의 전설 얽힌 산.
오백년 전의 학이 다시 날아들어 그 시절,
그 울음 다시 울며 문발 들녘에 너울거리고, 푹 저려 묵힌 된장 빛으로 한밤을 지켜낸
산정의 정자에서는 백학의 날개짓이 천상의 시공을 훨훨 드날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
조성된 둘레길로 차별없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오르내려 돌고 돌면서 세월 가듯
흘러 흐르고 있는 산. 거기에 절간이 보이고, 내 마음의 절을 한 채 세웠으며, 그 절간으로
가는 길은 멀지도 않고 아득하지도 않다. 날마다 가고 오고 걸으며 오르내리고 하는 생활의
장에 있을 뿐이다.
나의 초라한 아파트 서재에서 내려다보이는 문발 들녘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길이로 넓이로 아픔으로 밀려왔다가 쓸려가고, 금방이라도 첨벙 뛰어내려 성큼 안기고 싶은 은근한 유혹에 빠져드는 길. 확 트인 들판에 철따라 바람따라 어느덧, 문득, 제 모습을 변화시키는 신통력도 보여주고, 으스러지게 끌어안아 물어뜻고 싶은 환장하게 보고 싶은 유년의 배꼽도 거기에 있을 것만 같은 들녘 길, 굽이굽이 너울진 논길이 끼룩 끼루룩 묏비둘기 울음 같은 음률로 어두운 내장 속을 스멀스멀 비비고 들어오기도 하는 길. 꿈길 속에서 걷고, 뛰고, 달리고, 거꾸러지고도 아직껏 다다르지 못한 텅빈 들녘 끝에 아버지 어머니 생전의 모습이 나비 날개로 아른아른 환상의 한 점으로 일렁이는 길. 풋고추 달랑거리며 천변(川邊)의 쇠불알 바라보던 유년의 때 묻은 종아리가 천진무구한 유리구슬로 콕콕 들어박히는 저 들판의 떫고, 시고, 쓰디쓴 독한 맛으로 이어진 그 길. 지금껏 살아본 일 없는 낯선 고을에서 이 저런 풀잎과 들꽃과 참나무 그늘을 스쳐 불어오는 바람 한 무더기 물컹 스칠 때 고향은 새삼스럽고, 오래도록 아주 멀리, 까마득한 옛일로만 정리되었던 지난 추억이 문득 피동적으로 느껴질 때 도무지 낯설지 않고, 처연한 이색 감정에 한없이 매료되고, 이렇게 쌓인 희열은 포궁(胞宮,子宮) 회기본능에 의한 무의식의 순수 경지에 맞닿은 자연스런 길이며 영혼으로 이어진 깊은 길이지 싶다.
* 문발 교를 지나면서
황희 정승 문상길에서 문종의 교시로 비롯되었다는 문발(文發)이라는 지명. 문. 덕. 지를 활짝 꽃피우게 하라. 문(文)이 발(發)하리라. 이러한 내역을 가진 지세(地勢). 문발리(문발들판, 문발교), 요즘은 공장까지 들어선 문발공단. 이래저래 도타워진 정나미가 고향을 그립게 하고, 역사적 깊이로 묻어진 지운(地運)이 온 몸에 글기운(文運)으로 퍼져서 잘 쓰여지지 않는 시문도 술술 풀려질지 모를 일이라 얄팍한 야심 하나 쯤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들녘에 겨울이 와서 발등이 덮이도록 쌓인 눈이 철새 떼를 불러들여 끼륵, 끼르륵 기러기 날아 내리고, 낙조의 붉은 넋이 온 들녘을 풍선으로 부풀려 눈을 찔러 터뜨리고, 뽀드득 뽀드득 눈 쌓인 논길을 걸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눈은 왜 결백과 순결로만 표상되어야 하는가. 더럽고 욕되게 묘사되면 왜 안되는 것인가. 자근자근 덮씌운 생각 또 생각. 한나절 눈 덮인 문발교를 걸으면서 애꿎은 기존 관념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마음도 맑아져 나는 투명체 유리 인간이 된다.
*눈을 밟고 가자
눈을 밟고 가자/흙 묻은 발로 꾹꾹 눌러 힘주어 밟고 가자/선혈이 낭자한 눈을 으깨어 짓밟고/산 넘어 동굴까지 밟고 가자//어제의 눈이 오늘의/하얀 눈이 아니 듯이//누가 나의 눈을 밟아다오/즈믄 날들을 빛바랜 백색 공허는 /한천(寒天)의 별빛 냉기로 이마가 시려/투명한 가슴 열어 뵈는 얼음 하늘/ 하얀 나의 눈을 밟아다오//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모르듯이//눈을 밟아보자/텅 빈 들녘 하얀 눈을 다시 보면서 / 뽀드득 뽀드득/지옥문 번쩍 열릴 큰 소리로/지금까지,/ 밤에도 하이얀 눈을 밟아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