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自愧感
김성열
1.대답 없는 미아리
시는 죽고, 지금은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시보다 산문의 기운이 왕성한 시대적
흐름은 시의 역사와 삶의 조건 변화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즈음 시가 왜
안 읽혀지는가를 시인이면 당연히 자성해 봐야 할 것이다. 시의 사망선고는 시가
대중으로부터 유리(遊離)되어 종전의 많은 독자를 잃었다는 의미일 것인데 떠나간
독자를 시인이 왜 견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시의 발생은 동굴에서 홀로 남은 병약한 자가 무심중에 흥얼거리는 자기 흥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문(呪文) 대신으로 씨족이나 부락공동체의 정신적 주인 역을 담당했던
역사적 내역을 갖고 점점 복잡한 변화과정을 밟아왔다. 사회적, 민족적 공동체
의식과 정서를 노래로 응집하면서 그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게 발전, 진화 해 온
것이다.
오늘 날의 시는 전통적인 관념과 이론으로 수렴, 해석 할 수 없는 시작품이 무시로
생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종된 신생품에 당혹하고 경악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21세기, 인류 문화는 전대미문의 경이로운 세계를 창출해 가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시대다. 변화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표출되는 결과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을 다투어 또 새로운 것이 출현되는 어지럽고 혼란스런 삶의
조건하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예측 불허의 생활여건에서
시는 과연 무엇일까. 구태여 시인이고자, 시를 쓰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命名)해야 할 것인가. 엇그제의 시와 시인들의 낡은 유산을
끌어안고 들어주는 사람도, 미아리도 없는 깊은 골짝에서 제 홀로 부르는
노랫소리에 스스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변화된 삶의 조건을 시인의 숙명으로
받아드려 복잡한 갈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다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의 어느
한 쪽에 서서 시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갈려질 것이다.
2. 너무 쉬워서 이해 할 수 없는 시
시인이 변화무쌍한 현실을 수용하여 극복의지를 불태우지 못하고 어줍잖은 지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음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시를 쓰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채로, 시라는 형식을 비러 제멋대로 쓰여 진 시가 양산되고 있질 않는가. 분, 초를
다투어 쏟아지는 사회 모든 분야의 정보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자기도취에 넋이
나간 시인들을 볼 때 무엇 때문에, 무슨 의미로 시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읽어서
뻔한 내용, 진부하여 쉰내가 풀풀 나는 낡은 감상(정서), 유치하고 치졸한 현학(衒學)
취미,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통속적인 자기 넋두리, 시적 기교도 비유도
상징성도 결여된 직설법의 시문들...이러한 부류의 시들은 내용이 지극히 단순하여
이해하기도 쉽고 감상하기도 용이하다. 정보의 홍수와 변화의 물결에 허우적대는
현대인에게 조건화 된 유아기적 퇴행기제(退行機制)로 참신하거나 기이한 요소도
결핍된 내용의 시가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무슨 할 일이 없어 그러한
시를 읽고 있을 시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시는 내용도 문맥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라면 좋겠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시를 쉽게 쓸려고
애를 쓴다는 시인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쉽다, 어렵다하는 문제는 시인이나 독자의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로서는 관심두지 않는
사항이다. 다만, 복잡다기한 개인정서를 어떻게 단순화하여 친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가에 관심이 집중되는 점은 있다. 시작품이 인간 내면의 표출 양식이라면 현대인의
복잡 미묘한 내면적 요소가 결핍된 내용으로는 시로써의 상응한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
뻔한 일이다. 소아병적인 퇴행기제로 시의 주제나 정서를 다룬다면 그러한 시는
“떼쓰는 아이의 앙탈 같은 뻔한 의도성”이 노출되어 어른들(현대인)의 조롱거리 밖에
안 될 것이고, 시를 독자와 격리, 유리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3. 읽히는 시와 어려운 시
고강도의 검증을 거친 난해하다는 시도 그 나름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유별난
시인의 실험시나 고도의 지적, 철학적 소양을 담보로 하는 존재론적 형이상 시도
어렵다고들 하지만 시적 자양(滋養)과 가치의 함량이 넘칠 지경인 것이다. 이러한
난해시를 배격하는 시인이나 독자는 자신의 소양을 돌이켜 볼 일이지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러한 시가 절대적으로 바람직하느냐, 대중성 획득에
성공하겠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두고, 쉬운 시와 안 읽히는 시의 차원에서 보면
쉬운 시라고 하는 것은 감동(감흥)의 진폭이 미미하여 시의 존재가치를 의심받는
일이어서 그러한 시를 왜 쓰는지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어려운 시는 독자가
미처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안 읽히는 시로 밀려 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이 읽히는 시는 얼마든지 있다. 30쇄, 50쇄 이상의 단행본
시집들이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쉬우면서도 유치하지 않고, 술술 읽어지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새롭고 짜릿한 시구들, 평범한 일상어로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삶의 체험과 진실을 찝어 내고, 비범한 우주 진리에 도달한 시편들을
독자들이 몰라보고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고, 어찌 감히 외면당할 수 있을 것인가.
선량한 독자들에게 시 안 읽는 죄목을 씌워 책임 전가 한다거나 시의 사망이라는
자괴감으로 시대를 원망하기 전에 시인 된 자신의 시를, 세계를, 시대를 냉철하게
되짚어 볼 일이다.
시인 된 자신의 영육(靈肉)을 갈고 닦으면서 미증유의 현실조건을 총체적으로 수렴하고,
극복 의지와 신념을 확립하여 부단히 공부하는 시인만이 새롭게 사랑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나의 의식을 떠나지 않고 동기부여 해온 W.B. 예이츠의
시 한 편을 부수적으로 첨부코자 한다.
이 시는 자연적, 물리적 공간을 상징화함으로써 카시러가 말한 “유기체적 공간”을
창조한 시작품으로 그 참신성과 창의성이 너무 좋아서 내가 애독하는 시다.
위의 글과 연관 지어 비판적으로, 반성적으로 감상해보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비잔티움 항행(航行)
W.B. 예이츠
그것은 늙은이의 나라가 아니다.
젊은이는 서로의 품 안에서, 새들은 나무에서,
스스로 죽어가는 세대건만, 노래 부르고 있고
연어 뛰어오르는 폭포며, 청어 우굴거리는 바다며
어수조육(魚獸鳥肉)이며 온 여름 동안
온갖 배서 낳고 죽는 것을 찬미한다.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가
늙지 않는 예지(叡智)의 업적엔 등한하구나.
늙은 사람은 한갓 하찮는 물건,
허수아비 막대에 걸린 헌 옷자락 같기에,
영혼은 손뼉치며 노래하고,
이내 삭아질 옷자락의 조각조각을 더 소리 높여 노래하는 것.
또한 거기엔 노래하는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건 오직 영혼 스스로의 웅장한 업적의 탐구,
그러기에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런 도시 비잔티움에 왔나니.
마치 벽면의 황금 세공 가운데서처럼,
오 신의 성화(聖火) 속에 우뚝 선 현사(賢師)들,
그 성화에서 걸어나와 나를 에워싸 돌며,
나의 영혼의 스승이 되어 노래를 가르치라.
나의 가슴을 소멸케 하라. 욕망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에 억매여
그것은 스스로를 모른다. 나를
영원한 예술에 다소곳이 맡기라.
한번 자연을 벗어나면 나의 형해(形骸)는
어떤 자연의 것에도 닮을 것이 아니라,
희랍금공(金工)이 졸음에 겨운 황제를 깨워 두기 위하여
쳐 늘인 금과 황금 유약(釉藥0으로 만든
그러한 모습이 아니면,
비잔티움 고귀한 남녀에게
지나간, 또는 지나가고 있는 또 혹은 닥쳐올 것을 노래하게
황금 가지에 앉힌 새와도 같은 모습을 닮을 것을.(비잔티움 항행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