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종이어요 / 채영선
인두 불에 덴 자리없어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이 내겐 있지요
나는 그의 말벗이 되어
걸레질하며 설거지하며
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때로는
마을버스 지나는 언덕을 내려가면서
떨어진 밤톨을 줍기도 하고
은행잎이 물들어 아름답다고 말하지요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려도
마음조차 그에게 숨길 수 없지요
나는 힘든 일을 못 합니다
빨리 달려가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기억해야 하는 일도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요
아파하는 나를 그는 모른 척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든 머물고 있으면
어루만지는 음성이 물결처럼 울려서
언제나 듣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철 모르는 입술에는 노래를 담아주었지요
그의 넓고 깊은 서랍에는
모든 것이 차고 넘쳐납니다 열기만 하면
나는 몸종이어요
그의 눈은 어디에나 있어 나는 정말 자유롭지요
시집, * 사랑한다면 * 에서
......
사거리 신호등 위에서
비어있는 파킹럿에서
반짝거리는 카메라 눈앞에서
나는 자유로운 걸까
또 다른 눈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200204, 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