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아름다운 이유
민문자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 七十 古來稀)라는 말을 이제 어떤 말로 바꾸어야 적당한 말이 될까.
며칠 전에 고희를 맞은 내가 '아직 젊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까?
칠순이 되면 손자나 돌봐주며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겨우 문밖출입이나 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의 어려웠던 삶을 뒤돌아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식량이 부족하여 분식장려 캠페인을 열던 시대, 절량미 항아리를 집집이 부뚜막에 두고 쌀 씻기 전에 한 숟가락씩 떠 모아 굶는 이웃에게 보내던 때를 생각해 보라. 고깃국에 하얀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고 깁지 않은 옷, 구멍 난 양말 신지 않아도 되는 물질 풍부한 이 시대, 이 사회에 살고 있으니 이 아니 행복인가.
나라를 잃고 가난한 시대에 나는 인간의 형태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모자라게 태어났다. 일제 막바지에 시어머니도 없는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시누이를 시집보내기 위해서 아기를 뱃속에 넣고 열 달 동안 베틀에 앉아 베를 짜야만 했다. 산모는 기형아를 면한 아기를 겨우 낳았지만 먹는 것이 부실해서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심청이처럼 할아버지와 고모의 젖동냥으로 자랐다.
간난신고 끝에 자라면서 밤마다 다리가 아파 얼마나 고통을 많이 겪었던가. 아직도 어머니는 고향의 추수가 끝나면 다른 동생들에 우선하여 해마다 쌀 한 가마니씩을 보내주신다. 이 나이에 구순 노모의 아린 사랑을 받고 있으니 내 가슴이 짠하다.
어미돼지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으면 무녀리는 찌어리 중의 찌어리가 되어 보는 이의 애간장을 태운다. 바로 내가 이런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별명이 백여우 불여우로 불리던 건강한 꾀쟁이 동무들 꽁무니도 허덕허덕하며 겨우 따라다녔다. 백여우라고 불리던 벗은 환갑도 못 지내고 가서 벌써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십 년이나 흘렀다.
어린 시절 못나디 못난 무녀리, 지진아는 언제나 어깨가 축 처져서 기죽은 모습에 퍽 내성적이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열정만큼은 남달라 문학작품을 어려서부터 좋아하고 적은 돈이라도 돈만 있으면 책사기를 즐겼다.
여고 일 학년 때, 뒷자리에 앉았던 부잣집 친구는 오빠가 고려대학교 대학생이라며 한국문학전집을 자주 학교에 가져왔다. 그때 신간이던 그 책은 「무정」 「사랑」 「흙」 「순애보」 「상록수」 등이 실려 있었다.
"얘, 때 묻히지 말고 읽어!"
열일곱 여학생 때, 문학 작품 읽는 재미에 푹 빠져 그 구박을 받으면서도, 가슴 설레며 빌려 읽던 앙금이 뒤늦게 문학에의 열정으로 꽃이 필 줄이야, 그때는 어이 짐작했으랴.
가장의 사업이 번창했으면 지금쯤 호화저택에서 대중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업실패는 우리 부부가 문학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존경하는 스승들을 만나고 스피치와 수필과 시와 시낭송, 서화 공부를 하게 되었다. 또 하고 싶던 국문학 공부를 늦게나마 제대로 한 것은 내 인생의 로드맵이 그렇게 그려져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늦게 세상과 부딪치면서 점점 용감해졌다. 그 비리비리하게 허약하던 내가 문화예술 부문에 이끌려 씩씩하게 활보하는 모습으로 변한 것을 생각하면 여간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존경하는 작가들의 특강이 있으면 어디나 찾아가서 듣고 메모하고 다시 그 문학정신을 정리해보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여러 형태로 열리는 문학행사에 관심 끄는 곳은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2005년부터는 실버시대 실버들을 위한 실버넷뉴스 기자로 입문해서 문화예술관장을 역임하는 보람도 누렸다.
젊은 날, 서울대에 가서 공부해 보는 것이 꿈이 된 날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드디어 그 꿈을 이루었다. 서울-구로구 지도자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대-구로구 협력프로그램인 평생교육강사 인큐베이팅 과정도 수료했다. 이런 기회는 고목이 된 나에게 예쁜 꽃송이를 달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이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동아리 모임에서 강의를 연구하고 연습하는 행복한 시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 뉴딜일자리 평생교육강사 모집 공고가 나 신청했더니 선정되었다.
지난 7월 1일부터는 문학의 집·구로와 화원데이케어센터에서 스피치와 시낭송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지진아 무녀리에게 뒤늦게 꽃을 피우는 기회가 오다니, 이 얼마나 큰 보람인가. 나보다 젊고 예쁜 문학애호가들의 아름다운 시선 세례를 받으며 긴장된 시간을 내가 즐길 수 있을 줄이야.
몇 년 전부터 매달 《시사랑 노래사랑》에서 여는 구로아트벨리 소극장 무대에 서서 시낭송하는 것은 긴장된 행복의 시간이다. 지난주에는《시사랑 노래사랑》에서 시인 작곡가 성악가들의 가곡여행에 참여해 시낭송을 하고 대단한 환호를 받았다. 예술인들과 어울려 격조 높은 가곡을 함께 듣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져 있음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나의 시도 언젠가 날개를 달고 춤출 날을 꿈꾸어 본다.
황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를 흠뻑 누리기 때문이 아닐까? 내 생애 중 가장행복한 때, 지금이 그 때다.
(2013.7.20 한국수필작가회 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