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
오늘은 음력 오월 초여드레, 작은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삼십육 년이 되었다. 해마다 우리 부부는 이날이면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을 다녀온다. 인천은 가까운 거리이므로 우리 부부는 거의 빠지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한다.
오늘도 작은 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큰 사촌이 송도 신도시에 새집을 마련하고 처음 제사를 맞는 날이다. 텔레비전에서나 봄직한 넓고 멋지게 실내장식을 한 거실은 어머니와 숙모를 모시고 사촌 오형제 부부와 우리 남매 부부와 아이들이 다 모였어도 넉넉하였다.
이십여 년 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때 큰 사촌 사업이 부도직전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남편에게 그 사정을 전하였다. 남편은 두말없이 우리 사업도 부진하던 중에 사촌이 발행한 어음이 은행으로 돌아오는 대로 막아주었다. 남동생도 고향집 문전옥답을 팔아 주었다. 그래서 사촌은 최악의 위기는 모면하였던 것이다.
그 후 삼년 뒤 우리 사업은 이런저런 악재가 겹쳐 부도로 고생 고생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촌을 도와 준 것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으로 우리 사남매가 모두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뿐이었다.
2005년 정월에 할머님 제사를 지낸 후 나는 사촌들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었다.
"내가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입학금 사십만 원이 필요하다. 너희가 내 등록금을 마련해주면 고맙겠다."
당시 수필과 시로 등단한 상태였지만 선배들의 글을 보면 국문학을 공부한 분들의 글이 참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늦은 나이임에도 국문학을 꼭 공부하고 싶었다.
사촌들은 그 자리에서 사십만 원을 모아주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방송대학교 국어국문과 3학년에 편입학하고 마로니에 공원을 오가며 대학생활을 즐기며 하고 싶던 국문학을 공부하였다. 나보다 많이 젊은 교수와 학우들과 함께 고전문학 현대문학 강의에 매료되어 보낸 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교수의 지도아래 문학기행을 하고 영화를 보고 토론도하면서 시야를 넓혔다.
재주는 없지만 배우는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욕심꾸러기였으므로 문학 활동에 열심이었다. 원로문인의 특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듣고 메모하고 사진찍어서 내용정리를 하였다. 내가 드나드는 카페마다 글을 올려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말하기부터 시작하여 문학공부를 쉬지 않고 하다 보니 존경하는 스승을 여러분 모실 수 있었다. 삼년 전부터는 매달 구로아트벨리 소극장에서 열리는 <시사랑 노래사랑>에 시낭송을 정기적으로 하는 기회를 얻어 긴장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
(2013.6.17)